<청춘 &> ‘혼자 떠난 제주도 배낭여행’ 4회 / 김혜영

제주 여행 3일째, 역시 전날 만난 호스트의 추천으로 수월봉이라는 곳에 가게 되었다. 수월봉은 최근 TV 프로그램 ‘효리네 민박’에 소개되면서 사람들에게 알려졌지만, 필자가 여행할 당시만 해도 크게 유명한 관광지는 아니었다. 게다가 어렸을 때부터 지구과학에 관심이 없었던지라 큰 기대가 생기지도 않았다. 제주의 바다나 산은 어디든 아름다우니까 딱 그 정도의 만족감을 줄 것이라는 예상 정도. 호스트로부터 지질이 어쩌구, 트레킹이 어쩌구 하는 간략한 설명만 듣고선 무거운 배낭을 멨다.

 

 

정류장에 내리자마자 든 생각은 정말 시골 중에서도 시골인 곳에 와버렸다는 것이다. 야속하게 멀어져가는 버스를 바라보다 GPS로 작동하는 지도를 켰는데, 가야하는 길이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지 않았다. 현재 위치와 도착지만 점으로 나타날 뿐, 푸른 지붕의 시골집 사이로 난 여러 개의 길을 스스로 선택해야만 했다. 당황스러웠다. 뜨거운 햇빛 아래 여행의 모든 짐이 담긴 배낭을 메고 틀릴지도 모르는 길을 걷다니. ‘고생하려고 온 건 아닌데…’하는 생각을 하다, 아직도 효율을 찾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틀리면 어떻고 돌아가면 어때, 그림같은 풍경 속에서 여유롭게 걷는 것도 충분히 행복한 일인걸!

그렇게 속도를 낮추고 걸으니 불쾌할 정도로 덥지는 않은 날씨였다. 햇빛은 쨍쨍하지만 습기도 없고 바람도 잘 불어주는 날씨. 열심히 걷다보니 수월봉으로 향하는 표지판이 등장했는데, 가리키는 방향에 포장된 도로는 차치하고 제대로 된 길도 보이지 않았다. 풀숲이었다가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녀서 길처럼 보이는 길이 아닌 길. 더워도 긴바지를 입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풀과 나무줄기가 우거져있었다. 그러다 종종 빨간색과 파란색이 섞인 리본을 발견하면 제대로 왔다는 안도감이 들었는데, 그 리본은 올레길을 걷는 사람들을 위해 누군가 달아놓은 것이었다.

 

 

리본을 찾는 재미와 새의 지저귐에 빠지다보니 금방 꼭대기에 올랐다. 푸른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는데, 탁 트인 바다를 보며 육성으로 감탄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아무리 둘러봐도 동네마다 하나씩 있는 정자랑 안내판 하나만 썰렁하게 놓여 있을 뿐, 여행작가가 추천한 것 치고는 멋이 없는 곳이었다. 분명 트레킹을 하기 좋은 곳이라 했는데, 지층에 대한 시시한 구전과 설명이 쓰인 안내판, 햇빛에 지글지글 타고 있는 포장된 도로 뿐이라니. 요즘 말로 ‘제주의_흔한_관광지_jpg.' 뭐 이런 느낌이었다.

그래도 바다가 예쁘다는 점에 위안을 삼으며 정처 없이 길을 걸었다. ‘왜 이런 곳을 추천한 거야!’ 하고 돌아가서 버스를 탈 수도 있었지만, 바다를 옆에 두고 걷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물론 짧은 일정의 여행이라면 속상할 법하지만, 시간 낭비를 해보자고 떠난 여행이기 때문에 다시 마음을 고쳤다. 가방에 다 들어가지도 않아 여행 내내 고생을 시킨 삼각대를 펼쳐 혼자 사진을 찍기도 하고, 바람에 청보리가 날리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편하게 자동차를 타고 쌩쌩 달리는 이들에게 청승맞아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여행은 성공과 실패가 없는 것이니까 괜찮았다. 이 시간을 더 누리는 것이 중요했다.

 

 

플란더스의 개처럼 푸른 들판과 바다를 누비고 있었는데, 요새 유행하는 전동 퀵보드 등을 대여하는 곳이 갑자기 나타났다. 바다, 언덕, 나무, 풀 이런 것만 보이는 풍경에서 유독 튀는 그림이었다. 여기에 예쁜 해안도로라도 있나 싶어 대여하는 곳을 따라 내려가 보았는데, 세상에, 난생 처음 보는 풍경이 있었다.

인디아나 존스가 보물을 발견할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끝없이 펼쳐진 지층이 만든 장관 속에서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서 있었다. 이상하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름다운 석양을 볼 때처럼 가슴이 울렁거리고 큰 규모에 압도되어 온몸에 힘이 풀렸다. 파도는 바위를 또 조각이라도 하려는 듯 열심히 치고 있었고 지층은 나이테처럼 제 세월을 지키며 굳건하게 서 있었다. 얼마나 오랜 시간동안 공들여 만든 것일까. 아름답고 거대한 자연물은 해외에나 존재하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작은 섬에 있었다.

 

 

거대한 시각적인 충격을 경험하고 나니 쉬고 싶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뒤따랐다. 필자는 여행을 할 때 한 곳에 오래 머무르는 것을 좋아하는 편인데, 최소 3일은 있어야 그 지역이 몸에 익혀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전날 갔던 금능해변으로 향했다. ‘이 바다, 이 동네와 익숙해지리라’하는 생각이었다.

물론 가만히 앉아서 쉬는 것도 좋지만, 손은 바쁘게 움직이면서 뇌를 쉬게 하는 느낌도 꽤 좋다. 카페에서 친구와 이야기를 하다가 휴지로 종이접기를 하거나 영수증을 찢어본 적이 있다면 무슨 느낌인지 이해할 것이다. 필자는 어렸을 때부터 그 느낌을 좋아해서 악기 연주나 공예, 그림 그리기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치밀한 계산없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휴식을 취하는 것이다. 지금 당장 악기를 구하는 것은 무리고, 색연필과 노트는 어디서든 쉽게 살 수 있어 그림 그리는 것을 택했다. 연필처럼 생긴 8색의 색연필과 작은 스프링노트, 그리고 바다. 푹신한 모래로 의자를 만들고 손이 가는대로 바다를 그리기 시작했다.

 

 

스케치까지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정말 손이 가는대로 선을 그리면 작은 섬 비양도와 해변이 나타났다. 문제는 색을 입히는 것이었는데, 수채화로 바다를 그려본 적은 있어도 색연필로 그려본 적은 없어 퍽 난감했다. 바다는 색의 구분이 뚜렷하기보다는 여러 색이 모인 느낌이라 수채화로 자연스럽게 색을 섞고, 번지게 해서 구분을 없애는 작업이 탁월하다. 그러나 색연필은 정해진 색 이외에 더 창작할 수 있는 색이 없어 다양한 색을 만들어내기가 힘들었다. 이런저런 고민 끝에 무작정 바다를 칠하기 시작했는데, 그림을 잘 그리려는 욕심도 내려놓기로 했기 때문이다. 나는 언제까지 내려놓아야 편안한 마음을 자연스레 유지할 수 있을까.

필자가 쓴 연필 형태의 색연필은 색이 연한 것이 특징이다. 돌려쓰는 플라스틱 색연필은 색이 강한 편인데, 색연필은 색 조절이 쉬운 물감과 강한 크레파스의 중간단계로 느껴져 색이 연한 것이 매력이라 느꼈다. 그래서 연한 색연필로 바다를 칠하다보니, 한번 칠하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번 색을 칠해야 비로소 색이 표현되었다. 그러다보니 다른 색과 혼합해서 색을 표현할 수 있었고, 세 가지의 색연필로 수만 가지의 색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다에는 파란색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색, 파란색, 진청색, 보라색, 초록색 등 다양한 색이 있는데 한 겹, 한 겹 그 색을 올리다보니 지금 내 눈으로 보고 있는 바다를 어느 정도 표현할 수 있었다. 밀푀유 같았다. 천 개의 입사귀라는 뜻을 가진 밀푀유는 음식의 모양을 설명할 때 자주 쓰이는 표현인데, 색연필로 겹겹이 칠해가는 바다도 밀푀유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 개의 입사귀로 만드는 바다, 천 번의 색칠에는 내 마음의 평화와 바다를 좇는 마음이 담겨있어 너무나 아름답게 느껴졌다. 이 그림을 볼 때마다 지금의 내가 느낀 감정과 사고를 떠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늘의 기록은 그림, 밀푀유처럼 쌓아올린 그림이었다. 수월봉에서 본 지층과 나이테, 그리고 바다와 밀푀유. 오늘도 정말 좋은 여행을 했다. <대학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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