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닷컴> 마을모정 ①-논들 쉼터

▲ 마을 들머리숲의 그늘 속에 들어 들녘을 바라보는 서계정. 곡성 곡성읍 서계리 상동마을.

 

고창 심원면 만돌리 정동마을 모정 바닥에 마늘 바구리가 놓여 있다. 전사녀(79) 할매의 오늘 행적, 마늘밭에 드셨다.

“시방 곡석들이 질로 심들어. 비가 안와서. 밭곡석이 타들어간게 애가 타요. 가물라갖고 마늘 밑도 안들고.”

밭곡석을 자식인 양 측은해 하는 할매의 마늘밭은 모정에 뽀짝 붙어 있다.

“일허다가 허리 아프먼 여그 와서 조깨 앙겄다가 또 일허고.”

일과 쉼의 거리가 지척이다.

“쌀끔 싸다고 모 안 숨굴 수는 없제. 땅이 있응께, 아즉 몸뚱아리 끄꼬 댕길만헌께. 쌀끔이 지대로문 일험시롱도 더 심이 나겄제.”

모내기를 마치고 잠시 모정에 든 박하수(73·곡성 죽곡면 당동리 서정마을), 이성례(66) 부부의 말씀.

“논이 놀고 있으문 놈의 논이어도 아깝제. 짠하제.”

 

▲ 전사녀 할매의 오늘 행적, 마늘밭에 드셨다. 일과 쉼의 거리가 지척. 고창 심원면 만돌리 정동마을.
▲ 날로 키를 키워가고 날로 푸르러가는 모를 가차이 지켜보기 좋은 자리. 부안 하서면 장신리 양지마을.

 

화순 춘양면 월평리 옥평마을 모정에 앉은 이우(87) 할아버지는 “시방 비소식이 젤 기다리는 소식이여”라고 말한다.

모정의 주소는 논밭 가운데다. 한사코 땅을 지키고 곡식을 일구는 그런 마음들에 뽀짝 잇대어 있다.

이규보는 ‘사륜정기(四輪亭記)’라는 글에서 ‘정자에는 여섯 사람이 있으면 좋다’고 했다. 거문고 타는 사람, 노래 부르는 사람, 시에 능한 스님, 바둑 두는 두 사람, 주인이 있으면 능히 정자의 풍류를 이룰 수 있다는 뜻이다. 모정에는 꼭 여섯 사람이 있지 않아도 좋다. 대개 경관 좋고 한적한 곳에 자리한 선비들의 누정이 화려한 풍류의 산실이었다면, 일터 뽀짝 곁에 놓인 모정의 풍류는 땀의 풍류다.

 

▲ 드넓은 일밭에 쉼표처럼 놓인 모정. 화순 도암면 정천리 장천마을.

 

▲ “농사꾼들이 좋아하는 나무는 그늘나무여.” 키 큰 귀목나무 둘이 낮은 지붕을 쓰다듬고 있는 듯한 쌍수정(雙樹亭). 화순 동면 복림리.

한창 농사일에 바쁠 때 더위를 피하기 위해 논들 가차이 짚이나 띠풀로 지붕을 얹어 마련한 소박한 공간. 모정(茅亭)의 본래 형태는 글자 그대로 초가지붕이다. 시절 따라 지붕은 슬레트, 기와 등등으로 변해 왔지만 그래도 여전히 모정이란 이름이 친숙하다.

어쩌면 모정은 전라도의 ‘특산품’. 평야지대이자 쌀농사 지대인 전라도에 유독 집중해 있다. 모정이 농사 혹은 노동의 산물이란 증거다. 일망무제의 넓은 들녘 한가운데서 불볕을 가려줄 유일한 장소인 모정은 일미칠근(一米七斤)의 땀흘림 뒤에 드는 휴식의 공간이다.

1970년대 초반 박정희 정부는 ‘모정’을 막무가내 폐쇄하려 했다. 새마을운동에 저해가 된다는 게 이유였다. 이 공간을 일은 안 하고 그저 놀고 낮잠 자는 곳으로 여긴 것이다. 일과 쉼이 선순환하는 모정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한 몽매였다.

“나도 얼릉 해놓고 저그 갈라고.”

밭에 엎드린 서옥엽(77·여수 소라면 사곡리 장척마을) 할매가 가리키는 ‘저그’는 큰 나무들이 강강술래하듯 둥그렇게 둘러선 곳에 자리한 모정.

“들꽤씨를 몬야 심었는디 어째서 잘 안 나와. 안 난 자리에 다시 심고 있어.”

모정 그늘에 미리 들어 있는 아짐 할매들이 계속 손짓한다.

“나보고 얼릉 오라고 허요, 안. 나만 혼차 일하고 있응께. 우리는 에어콘도 필요없어. 저 그늘 밑에만 들문 시언한께.”

“울 아그들이 온(오늘) 아직에도 전화했어. 날 뜨건께 절대 밭에 가지 말라고. 날마동 신신당부여. 나는 만날 회관에서 논다, 꺽정말아라 그래.”

다른 거짓말은 못해도 자식들한테 ‘나 논다’는 거짓말은 잘해진다는 어매들인 것이다.

 

▲ 나무 두 그루 벗하여 들녘에서 일하는 이들을 위한 그늘을 짱짱히 지어낸다. 화순 도암면 월평리 옥평마을.
▲ 유재 간에 오다가다 머물러 집안일도 농사일도 공동의 관심사로 한데 나누는 그 자리. 화순 도암면 정천리 장천마을.

 

“일을 놔뚜고 우쭈고 논다요.”

시방 모정 곁을 잰 걸음으로 지나는 곡성 죽곡면 당동리 서정마을 정삼임(88) 할매.

“모정은 쳐다만 봐. 일철이라 밭에 매이고 논에 매이고. 우리는 그러고 살아. 팽야 일헌 재미제. 논 있고 밭 있은께, 이 할매를 지달리고 앙겄는 작물들 있은께 아직에 눈을 똑 뜨고 인나.”

하루 해는 저물어가는데 깨밭에서 나올 줄 모르는 양기덕(86·나주 남평읍 우산리), 송영자(76) 할매. 모정이 지척이지만 그 쪽으로 걸음할 새도 없다.

“징그랍게 가물아. 꽤씨가 잘 나올란가 꺽정이여.”

이웃인 송영자 할매가 깨밭에 물 주는 일을 거들고 있는 중이다.

“우리는 유재(이웃) 덕분에 살아.”

유재가 ‘빽’인 시골 할매 할배들한테 ‘유재’란 논밭 작물들의 안부를 서로 챙기는 사이.

 

▲ 모정의 주소는 논밭과 지척이다. 논밭에 뽀짝 잇대어 있다. 나주 남평읍 우산리.
▲ 일 끝에 만나서 좋은 것은 역시 바람과 일동무들. 최고의 위로를 받는 데 부족함이 없다. 하루일을 마치고 한데 둘러앉아 땀을 씻는다. 무안 해제면 유월리.

 

드넓은 일밭에 쉼표처럼 놓였다. 화순 도암면 정천리 장천마을 모정. 모정을 둘러싼 들녘에선 모내기가 한창이다.

모정 자리가 예전에는 집터였노라고 말하는 동네 어르신.

“바로 집 밑이라 여그는 처마배미. 마당에 감나무도 있었어. 그래서 여그는 감나무밑에배미….”

그런 사연과 이름을 거느린 논들이 이 모정을 둘러싸고 있다.모정은 들녘을 바라보며 농사 이야기를 나누는 곳, 남의 논밭일지라도 참견하고 걱정하는 곳.

모정 가까이 자리한 논밭의 주인이라면 남보다 갑절은 부지런해야 한다. ‘모정에서 내려다보는 눈’들이 무서워 논두렁의 풀도 더 깨끗이 깎고 피사리도 없게 더 부지런을 떨 수밖에.

<한 떼의 잠든 일꾼들/ 모두 臥佛 같다// 미륵님들은/ 왜 누워계시나?/ 뼈빠지게 일하는 사람들,/ 쉴 줄도 놀 줄도 모르는 사람들,/ 좀 쉬라고,/ 휴식이란 이렇게 하는 거라고,/ 몸소 모범을 보이며 누워 계신 게야>(안도현 ‘茅亭 아래’)

좀 쉬라는데, 어매아배들은 모정 언저리마다 쟁글쟁글 땡볕을 이고 논밭에 엎드려 있다.

글 남인희·남신희 기자 사진 박갑철 기자·심홍섭

 

▲ “쌀끔 싸다고 모 안 숨굴 수는 없제. 쌀끔이 지대로문 일험시롱도 더 심이 나겄제.” 모내기를 마치고 잠시 모정에 든 박하수 할아버지. 곡성 죽곡면 당동리 서정마을.
▲ 호미씻이 대신 모내기 끝에 트랙터를 씻어 두고. 오늘 하루치의 노고를 이웃과 함께 나눈다. 여수 화양면 서촌리 서촌마을.
▲ 일하다가 금세 그 그늘에 들 수 있고, 누구네 논밭 작물들의 안부를 마을 사람들 누구든 살필 수 있으니 지정학적 위치가 최고. 완주 구이면 두현리 원두현마을.
▲ 논밭으로 향하는 길목에 자리한 모정. 마을숲 긴 그늘 속에 기대어 섰다. 화순 남면 내리 평촌마을.
▲ “일을 놔뚜고 우쭈고 쉰다요.” 해는 저만치 저물어가는데 깨밭에서 나올 줄 모르는 양기덕, 송영자 할매. 나주 남평읍 우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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