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강진수의 '요즘 시 읽기' - 4회

▲ 사진=pixabay.com

 

어머니가 나에게 꽃을 선물해주었다 어머니
이건 어머니잖아요
나는 어머니를 벽에 걸어두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어머니를 말했다. 어머니는 낡았고 감상적이래
나는 벽을 돌아보지 않았다
벽이 무너진다
무너진 벽을 언제 돌아보았나. 어머니가 허공에 걸려 있다. 마른다. 부서진다.
나는 가벼워지는 거란다
말씀 좀 그만하세요
무거워지니까
내 방에는 바닥이 없잖아요
괜찮아, 나는 발이 없단다. 발은 언제나 발의 주변만을 남기고 사라져
말씀 좀 그만하세요
어머니
이건 어머니가 아니잖아요. 어머니는 허공에서 말없이 꽃을 그린다
그 꽃이 떨어지지 않는다

한인준, <무게>, 《아름다운 그런데》

 

▲ 한인준의 시집《아름다운 그런데》

가벼워진다. 모든 것이. 그것은 계절에 얽힌 것도, 날씨에 얽매인 것도 아니다. 그저 가벼워질 때가 온 것이다. 그 때를 기다린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무한히 기다려야 할 수도 있고, 그러다보면 자연스레 그 때를 포기하는 순간이 오기도 한다. 그래도 가벼워진다는 것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혜택이 아니다. 내 무게를 느낄 수 없는 때, 그럴 때 우리는 가벼워졌다고 말한다. 더 이상 고통으로 점철되지 않고서 말라버린 꽃이 바스락거리는 것처럼 한없이 가벼운 몸으로 벽에 게시되어 있는 것이다.

무엇이 어머니를 그토록 가볍게 만들었을까. 우리는 어느 순간 야윈 어머니의 모습을 잘 알고 있다. 한인준이 포착한 그 일상은 어머니와 자식 간의 관계를 분명히 그려낸다. 그런데 그게 전부는 결코 아닌 것 같다. 야윈 어머니에게서 말라비틀어진 꽃을 보고 만 아들, 또는 자식의 시선에는 대체 무엇이 걸려 있었을까. 그것은 힘이다. 잡아당기는 힘과 버티는 힘. 중력과 무게의 중간에서 우리가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생활을 한다. 힘은 이처럼 생활의 근간이 된다. 모든 관계와 삶에는 힘이 작용한다. 자식은 어머니에게서 그 힘을 읽은 것이다. 수명을 다한 별처럼 사그라지는 힘, 이제 버티는 힘은 없고 오직 잡아당기는 힘만이 말라버린 꽃에는 작용한다. 그래서 결국 힘없이 바닥으로 툭, 하고 추락해버린다. ‘무게’라는 시의 제목은 이런 상관관계를 너무나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음을 대놓고 알려준다. 시인은 자신이 포착한 어떤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쉽게 설명도 되지 않는다. 오직 시의 세계에서만 풀어서 쓰일 수 있는 주제라는 것을 시인도 역시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이 무게감 있는 시의 세계를 흐름대로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손으로 만진다고 느껴지는 것이 아니고, 눈으로 본다고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도 아니다. 무게는 무게다. 무게는 온몸으로 느껴야 한다. 시는 이처럼 머릿속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경지의 무언가가 있다. 그것은 모호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모호한 것은 모호한 것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이 시를 읽는 하나의 방법이다. 시인의 의도, 단어의 의미 따위를 따질 필요가 전혀 없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말과 말 사이에 작용하는 힘이다. 그게 한인준의 이 시에서는 무게로 나타나고 있다. 우주에서 별과 별 사이, 행성과 행성 사이가 무언의 힘으로 잡아당기고 밀듯이, 한인준이 만들어낸 무게는 말과 말 사이에서 잡아당기고 밀며 팽팽하게 작용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 무기력해지는 그의 말의 무게를 보라. 애초에 이 시는 어머니만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어머니를 통해 우주를 보여주는 것이다. 우주라는 세계의 원리로 어머니를 풀어내고 있는 것이다. 충분히 복잡하며 동시에 이론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세계의 실마리는 어머니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무게다. 그 무게를 중심으로 모든 다른 말들은 빙글빙글 돈다.

이쯤 되면 시를 읽는 것이란 거짓투성이인 것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인은 결코 함부로 공백을 남용하지 않는다. 시인이 위의 시에서 행과 행 사이에 비워놓은 빈 공간들을 보라. 어머니에 대한 감정, 그리고 어머니라는 하나의 인간상으로 이 시를 마무리하기에는 너무 시가 가지고 있는 빈 공간이 많지 않은가. 그 빈 공간은 반드시 색깔 있는 무엇으로 채워져야 할 필요가 없다. 그곳에는 이미 각기의 무게가 자리 잡고 있다. 시는 원체 이처럼 추상적인 것이며 형이상학적인 것이다. 사실적인 묘사와 현실의 소재들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 같지만, 말의 세계는 그 경계를 뛰어넘는다. 가벼워 보이는 것들이 무게를 갖고, 바닥에 떨어질 것만 같은 덩어리가 산산이 흩어져 부유한다. 말과 말 사이의 결합, 행과 행 사이의 공간은 이처럼 해체되었다가도 다시 달라붙고를 반복한다. 이러한 시의 세계성은 결코 거짓이 아니다. 실존하는 것들이고, 시를 읽는 순간 우리는 체험할 수 있다. 체험은 이론적인 것이 아니므로 이성으로 받아들이려고만 해서는 안 된다. 말 그대로 온몸의 감각으로 시를 읽어나가는 것이다. 한 단어와 단어, 한 문장과 문장에는 시인의 의도가 아니라 시인의 감각과 몸, 그리고 생애가 있다. 우리는 그 삶을 읽어내야 한다.

그래서 시를 읽는 방법이란 실질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실존하는 것은 느낄 수 있을 뿐, 어떤 방법론에 의해 옭아지지 않는다. 영원히 떨어지지 않는 꽃을 상상하라. 그 모습은 어머니를 그려냄과 동시에 어머니의 주변 세계를 나타낸다. 하나의 말로 여럿을 상상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세계이고, 우리가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우주다. 그래서 이 시의 꽃은 무게로 잴 수 없고, 오직 느낌으로만 알 수 있는 무게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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