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벽을 무너뜨릴 때 더 좋은 시가 된다
장벽을 무너뜨릴 때 더 좋은 시가 된다
  • 강진수 기자
  • 승인 2018.04.23 15: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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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강진수의 '요즘 시 읽기' - 2회

 

시의 영역이 어떻게 운문에만 국한된다고 할 수 있을까. 산문에서 드러나는 시의 유산들은 운문보다도 더 날카롭고 매섭다. 우리는 얼마 안 되는 시로부터의 걸음을 산문에서 시작해보려고 한다. 영역을 바라보는 일은 더 흥미롭고 즐거운 일이기 때문이다. 시와 소설(이야기)의 영역을 나누는 일은 절대로 쉽지 않다. 그만큼 시라는 것은 형체가 없는 장르와 같다.

 

▲ 함민복 저서 <눈물은 왜 짠가>

지난 여름이었습니다 가세가 기울어 갈 곳이 없어진 어머니를 고향 이모님 댁에 모셔다 드릴 때의 일입니다 어머니는 차시간도 있고 하니까 요기를 하고 가자시며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한평생 중이염을 앓아 고기만 드시면 귀에서 고름이 나오곤 했습니다 그런 어머니가 나를 위해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시는 마음을 읽자 어머니 이마의 주름살이 더 깊게 보였습니다 설렁탕집에 들어가 물수건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습니다

“더울 때일수록 고기를 먹어야 더위를 안 먹는다 고기를 먹어야 하는데…… 고깃국물이라도 먹어 둬라”

설렁탕에 다대기를 풀어 한 댓 숟가락 국물을 떠먹었을 때였습니다 어머니가 주인아저씨를 불렀습니다 주인아저씨는 뭐 잘못된 게 있나 싶었던지 고개를 앞으로 빼고 의아해하며 다가왔습니다 어머니는 설렁탕에 소금을 너무 많이 풀어 짜서 그런다며 국물을 더 달라고 했습니다 주인아저씨는 흔쾌히 국물을 더 갖다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주인아저씨가 안 보고 있다 싶어지자 내 투가리에 국물을 부어주셨습니다 나는 당황하며 주인아저씨를 흘금거리며 국물을 더 받았습니다 주인아저씨는 넌지시 우리 모자의 행동을 보고 애써 시선을 외면해주는 게 역력했습니다 나는 그만 국물을 따르시라고 내 투가리로 어머니 투가리를 툭, 부딪쳤습니다 순간 투가리가 부딪치며 내는 소리가 왜 그렇게 서럽게 들리던지 나는 울컥 치받치는 감정을 억제하려고 설렁탕에 만 밥과 깍두기를 마구 씹어댔습니다 그러자 주인아저씨는 우리 모자가 미안한 마음 안 느끼게 조심, 다가와 성냥갑만한 깍두기 한 접시를 놓고 돌아서는 거였습니다 일순, 나는 참고 있던 눈물을 찔끔 흘리고 말았습니다 나는 얼른 이마에 흐른 땀을 훔쳐내려 눈물을 땀인양 만들어 놓고 나서, 아주 천천히 물수건으로 눈동자에서 난 땀을 씻어냈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눈물은 왜 짠가

함민복, <눈물은 왜 짠가>, 《눈물은 왜 짠가》

 

이 시는 시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로 스토리텔링이 매우 강한 시다. 꼭 동화를 읽는 느낌처럼 시가 읽힌다. 무엇보다도 그 어떤 시보다 이해가 쉽다. 어머니와 아들, 그리고 설렁탕집 주인아저씨가 그림처럼 머릿속에 그려진다.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면, 시인의 개인적인 경험이라고 한다면, 이 글은 수필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수필과 시를, 동화와 시를, 소설과 시를 반드시 어떤 경계로 나누어야만 할까. 시의 무한한 영역을 느껴보자. 눈물은 왜 짠가, 라고 되묻는 시인의 마지막 질문에서 우리는 시적인 환기를 느낄 수 있다. 저 한 문장에 시인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은 것 같은 느낌이 들고 이 글을 시로서 진정 받아들이게 된다.

이처럼 시에는 단 한 문장이라도 폭발적인 어떤 기운을 담고 있다면, 글이 긋는 영역의 전체를 시의 영역으로 만드는 능력이 있다. 그것은 시인 개인의 능력이기도 한데, 그 경계를 오고가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수필의 성질이 시와 만났을 때, 그 이야기는 시의 여운을 더욱 길게 남겨주곤 한다. 소설적이기도 한 분위기와 성질들이 시를 뒤덮는다. 그리고 단 한 문장, 그 여운을 터뜨려줄만한 시기를 엿본다. 다음의 시도 그 한 문장이 무척이나 매력적인 시이다. 앞서 읽은 시보다는 스토리텔링이 적고, 심지어는 무슨 이유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하는 순간에 단 한 문장이 치고 들어온다. 그리고 우리 모두를 끄덕이게끔 한다. 그렇지. 우리 모두는 그런 세상 속에 살고 있지. 시는 세상을 이야기하고 있고 세상에 사는 우리는 시를 너무 쉽게 받아들인다. 아래의 시를 읽어보자.

 

배고픈 고양이 한 마리가 관절에 힘을 쓰며 정지 동작으로 서 있었고 새벽 출근길 나는 속이 웅렁거렸다. 고양이와 눈이 마주쳤다. 전진 아니면 후퇴다. 지난 밤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나와 종일 굶었을 고양이는 쓰레기통 앞에서 한참 동안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둘 다 절실해서 슬펐다.

“형 좀 추한 거 아시죠.”

얼굴 도장 찍으러 간 게 잘못이었다. 나의 자세에는 간밤에 들은 단어가 남아 있었고 고양이의 자세에는 오래전 사바나의 기억이 남아 있었다. 녀석이 한쪽 발을 살며시 들었다. 제발 그냥 지나가라고. 나는 골목을 포기했고 몸을 돌렸다. 등 뒤에선 나직이 쓰레기봉투를 찢는 소리가 들렸다. 고양이와 나는 평범했다.

간밤에 추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허연, <간밤에 추하다는 말을 들었다>, 《나쁜 소년이 서 있다》

 

간밤에 술자리가 있었나보다. 이른 아침부터 속은 웅렁거리고, 고양이와 나는 서로를 애처롭게 바라본다. 그리고 스쳐지나가는 단 하나의 기억, 아마 후배 누군가가 말했을 것이다. “형 좀 추한 거 아시죠.” 몇 번이고 “취한 거 아시죠.”가 아니었을까 고민했을 것이다. 내가 잘못 듣지 않았을까. 그런데 암만이고 생각해봐도 “추한 거 아시죠.”가 맞는 것 같다. 나보고 내 모습이 추하다고 했던 것 같다. 그것도 아마 술에 만취한 간밤에, 차라리 가지 말았어야 할 술자리에 나는 추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너무나도 공감이 갈 수밖에 없는 이야기다. 우리의 세상은 추할 일이 너무 많은 곳이니까, 그리고 그 기억들은 잊으려 해도 정말 잘 잊히지 않는다. 그래서 지나가는 길고양이에 나를 대입한다. 사실 이 시는 함민복의 시와는 달리 친절하지 않다. 이야기도 불분명하고, 모든 것은 추측에 두게끔 단서만 제공한다. 그런데 이런 시를 읽는 즐거움이 얼마나 큰가. 그 간밤의 일을 상상하며 시를 읽는 나는 정말 얼마나 추한 사람이었던가를 되돌아보게끔 한다. 함민복의 시보다는 오히려 더 소설 같은 느낌도 있다. 중요한 것은 소설이든, 시이든, 수필이든 간에 그것의 경계를 허무는 것은 시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스토리가 있다고 시가 될 수 없다는 것은 핑계일 뿐이다. 역할을 나누는 장벽을 무너뜨릴 때, 시는 단 한 문장을 가지고도 더 좋은 시가 되고 울림을 준다. <대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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