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류승연의 ‘아주머니’

요즘 행복하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답변을 하는 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네, 행복합니다”라는 말이 곧바로 나온다. 매 순간이 행복해 미칠 것처럼 좋아서 나오는 답변은 아니다. 아이들을 학교 보내놓은 어느 날 아침, 혼자서 햄버거를 먹을까 해장국을 한 그릇 먹을까 고민하다 문득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고민거리가 고작 ‘무엇을 먹을까’인 지금의 상태가 참으로 행복하고 감사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행복은 모든 인간의 공통된 관심 주제다. 모두가 행복을 추구하며 산다. 하지만 더 많은 행복을 갈구하는 자들은 삶이 주는 행복을 잠시라도 잃어본 적이 있는 자들일 것이다. 건강을 잃고 나서야 건강의 소중함을 깨우치듯이 행복이 잠시 곁에서 멀어졌다는 것을 느껴보고 나서야 그 가치를 더욱 절실히 알게 되는 것이다.

 

▲ 사진=pixabay.com

 

아이를 양육하는 엄마들 입에서 ‘행복’이라는 말이 유난히 자주 오르내리는 이유도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은 어디에도 비할 데 없는 큰 기쁨이지만, 그만큼의 희생과 고통도 불가피하게 따른다.

평생 내 몸뚱이 하나만 잘 먹고 잘 살면 되었던 날은 사라지고 어느 날부터 나 없으면 안 되는 작고 연약한 존재의 생명을 온전히 책임지고 살아간다는 게 여간 힘든 일이라야 말이지.

잠을 원 없이 잘 수 있길 하나, 밥 한 번을 마음껏 먹을 수 있길 하나, 텔레비전 한 번을 제대로 볼 수 있길 하나, 맥주 한 모금을 시원하게 마실 수 있길 하나. 자유는 박탈당하고 몸은 고되다. 행복은 저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육아 전쟁’이라는 말이 나오고, 모든 미디어와 서점에선 “엄마가 먼저 행복해야 아이도 행복하다”고 부르짖곤 한다.

‘육아 전쟁’의 시간을 더 오래 치러야 하는 장애 아이 엄마들은 더하다. 남들은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나이만 되어도 어느 정도 숨 쉴 틈이 생기는데, ‘어린 아이’로 더 오랜 시간을 살아야 하는 자식을 보고 있으면 엄마들은 그 끝이 어디쯤일까 가늠하기도 힘들다.

그러다 보니 절망에도 빠져보고, 절망 속에 있을 땐 행복이라는 게 남의 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회복탄력성을 지니고 있기에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다시 일어설 힘을 얻게 된다. 이제 남의 것인 줄만 알았던 행복을 스스로가 다시 찾기로 마음먹은 엄마들은 행복해지기 위해 이전보다 더욱 많은 노력을 한다.

사실 이건 내가 겪어온 과정이기도 한데 얘기를 들어보면 많은 엄마들이 비교적 비슷한 길을 걸어온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 얘기를 꺼낸 이유가 무엇이냐면, 요즘은 너나 할 것 없이 행복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는 게 아닐까 해서다. 인간은 당연히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나도 그렇다. 행복해지기 위해 매일을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 행복이 스스로 느끼는 행복인지 남에게 과시하기 위한 행복인지를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너나 할 것 없이 “행복합시다”를 외치다 보니, 너나 할 것 없이 행복해 보이는 일상을 앞 다퉈서 늘어놓는다. 그리고 스스로도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보며 행복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난 그렇게 행복을 외치는 그녀들이 행복해보이지 않는다.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지 신이 나서 이야기를 늘어놓는 그들에게서 오히려 공허함이 보인다. ‘행복을 가장한 공허한 삶’이 보이는 것이다.

내가 얘기하고자 하는 첫 번째 그녀는 경제적으로 부족할 게 없는 ‘사모님’이다. 부유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자식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교육환경을 모두 지원해 준다. 돈으로만 뒷바라지 하는 것도 아니어서 그녀 역시 아이들을 위한 삶에 헌신을 한다.

그녀의 행복은 자식들이다. 행복의 목적인 자식들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줄 수 있기 때문에 그녀는 행복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때때로 그녀는 아이들에게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른다. 어쩔 땐 욕도 한다.

아이들이 행복한 게 자신도 행복한 것이라 믿고 있는 그녀인데, 그런 소중한 아이들에게 화를 내고 감정을 쏟아낸다. 물론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가끔씩 터지는 그녀의 히스테리는 행복한 사람에게서 보이는 그것은 아니다.

얘기를 하고 싶은 또 다른 그녀는 자신이 먼저 행복해야 자식도 행복하다고 믿고 있다. 나도 이 말에 적극 공감한다. 사실 요즘에는 이런 인식이 대세이기도 하다. 자식을 위해서는 엄마가 정서적으로 안정되는 게 중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엄마가 먼저 행복해지기 위해 그녀는 자신의 삶을 당당히 살아나간다. 엄마가 아닌 자신의 이름으로 일을 하고 사회활동에 많은 시간을 보낸다. 주변에서는 멋진 여성이라고 박수를 보내고 그녀 역시 그런 자신의 모습을 뿌듯해 하며 주변에 ‘행복론’을 전파한다.

하지만 내 눈에는 그녀도 행복해보이지 않는다. 분명 행복하다고 외치는 그녀인데 하루가 멀다 하고 남편과 부부싸움을 한다. 대화도 없다. 자식 얘기를 하는 것 말곤 남편과 나누는 이야기가 없다고 한다.

나는 그녀들의 모습을 보면서 ‘진짜 행복’과 ‘가짜 행복’에 대해 생각을 한다.

‘진짜 행복’은 스스로가 느끼는 행복이고 ‘가짜 행복’은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행복인 것 같다. 그리고 그 둘을 구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가장 가까운 이들, 바로 가족과의 관계를 보는 것이다.

정말로 행복을 느끼는 사람에게선 마음에 여유가 느껴진다. 그 여유는 자신은 물론 남편과 자식도 충분히 껴안을 수 있을 정도로 넓고 크다. 굳이 스스로가 “난 행복해~”라고 말하지 않아도 그녀가 남편과 눈을 마주보며 웃는 모습, 자식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행복감이 느껴진다.

하지만 행복을 가장하고 있는 이들은 가족과의 관계가 삐걱거린다. 분명 자신의 행복을 만방에 알리고 사는 그녀들인데 자식에게 어두운 감정을 쏟아내고, 남편과는 차가운 관계를 유지한다.

아무리 그녀들이 행복하다고 말해도 그 말이 곧이곧대로 들어오지 않는다. 가족이 배제된 혼자만의 행복이라면 그 행복이 진정한 행복이라 말할 수 있을까?

왜 이렇게 우리는 행복도 과장하고 과시하면서 살게 되어버린 것일까? 행복하면 행복하다 말하고, 힘들면 힘들다고 말하면 될 텐데 어느 순간부터 모두는 행복해야 한다는 집단 강박에라도 걸려있는 것 같다.

여기저기 ‘행복론’이 난무하는 것을 보면 ‘진짜 행복’은 그만큼 찾기 힘든 것인가 싶기도 하고.

요즘 나는 행복하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행복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꼭 사족을 붙인다. 내가 말하는 행복은 일상을 평범하게 살고 있기 때문에 행복하다는 것이라고. 미칠 듯이 행복해서가 아니라, 특별한 일 없는 삶이 영위되고 있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라고.

아이들을 데리고 죽을까, 나 혼자 죽을까를 고민하던 어둠의 시간을 살아본 적 있기 때문에 무엇을 아침으로 먹을까 따위를 고민하는 요즘의 일상이 행복하다고.

이런 내 행복은 남들에게 과시할만한 성질의 것은 아니다. 남들이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 가서 한껏 멋을 내며 행복해할 때 나는 우거지해장국 집에 가서 국물에 고추씨기름을 한 아름 부으며 행복해하기 때문이다.

비록 남들에게 과시할만한 행복은 아니지만 이 때 느끼는 행복감은 스스로가 느끼는 정직한 행복감이기에 나는 행복하다. 그리고 이 행복한 마음은 가족들에게도 전달되어서 나는 자식들이 사랑스럽고 남편은 크게 밉지가 않다. 비록 자식들에게 폭풍 잔소리를 늘어놓고, 남편과도 여전히 티격태격하지만 적어도 가족 간의 관계가 차갑거나 밋밋하지는 않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감히 행복하다고 말한다.

행복. 이왕 인간으로 태어나 살고 있으니 행복하게 살다 가는 게 낫다. 행복하게 사나 불행하게 사나 시간은 똑같이 흐르고 언젠간 죽음에 이른다. 그렇다면 당연히 행복하게 살다 가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행복을 찾기 위해 억지로 애쓰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행복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억지로 애쓰다보니 행복도 과시용이 되어버린다. 이미 과시용이 되어버린 행복엔 진정성이 없다. ‘진짜 행복’과 ‘가짜 행복’ 중 어떤 것을 잡을 것인지…. 각자가 선택할 일이다.

<'아주머니'는 아직은 주인공이 아니지만 머지않아 니가 세상의 주인공이 될 얘기를 가리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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