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하지만 전혀 사소하지 않은 것을 발견하다
사소하지만 전혀 사소하지 않은 것을 발견하다
  • 김혜영 기자
  • 승인 2018.04.19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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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 일본에 가다> 3회 / 김혜영

3학년 마지막 학기다. 휴학을 하지 않은 동기들은 4학년이 됐고, 벌써부터 취업 잔소리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항상 꿈과 목표를 간직하고 열심히 살고 있다고 어필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늘 낙관적이고 대책이 없다는 평가만 내렸다. 한두 번이면 무시하겠지만, 여러 번 반복될수록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학교에서 장학금을 받았다. 잠깐 현실에서 떠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가장 싼 비행기 표를 알아보았다. 일본의 기타큐슈였다. 언니에게 별 기대 없이 같이 가자고 물었더니, 언니가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가자고 답했다. 언니는 취업준비생이라, 그동안 어디에 가자해도 꿈쩍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단번에 대답하는 것을 보며 어딘가 씁쓸해졌다. 늘 강하던 언니도 지치고 힘들었구나. 그래서 따뜻한 온천이 도처에 있는 일본으로 떠났다. 그 세 번째 이야기다.

 

 

여행을 하다보면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이 아까워 꼭두새벽부터 일어나게 된다. 괜히 옷을 펼쳐놓고 무엇을 입을지 고민하기도 하고 바다를 한 번이라도 더 눈에 담으려 노력한다. 그러나 이번 여행의 마지막 날은 일찍 일어나고 싶은 마음과 늦잠을 자고 싶은 마음이 모두 컸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고된 일상으로 돌아갈 것을 알기에 더 놀고 싶은 욕구와 쉬고 싶은 욕구가 충돌한 것이다.

고등학생 때부터 정해진 취침 시간과 기상 시간은 대학생이 되어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보통 잠에 드는 시간은 새벽 3시로 일정한데, 기상시간은 오전 7시 아니면 오후 12시로 나뉜다. 해야 하는 일이 많아서 늦은 시간에 잠을 청하는 것은 당연하고, 다만 일정에 따라 기상시간이 극과 극인 것이다. 학교에 가야하거나 일이 있으면 오전 7시에 억지로 일어나고, 일이 없으면 오후 12시까지 늦잠을 자고 겨우 일어난다. 그 탓에 아침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늘 몸과 마음이 무겁다.

결국 해야 하는 일이 많은 것이 문제였다. 단순히 일만 많은 것은 아니었고, 하고 싶은 일도 너무 많아서 해야 하는 일이 되어버렸다. 친구 만나기, 영화 감상하기와 같은 노는 일마저 원하는 순간에 즉흥적으로 결정할 수 없고 늘 미리 시간을 정해서 지켜야 했다. 소설 ‘모모’에서 시간을 빼앗기고 바쁘게 살아가는 어른들처럼 말이다. 놀아도 쉬는 것 같지 않고 일의 피곤함은 해소되지 않은 채 하루하루가 반복되었다. 여유를 찾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간절했다. 그래서 나의 일상에서 거리감을 두고 고민해보기 위해 여행을 떠났다. 마지막 날의 기상시간도 평소에 아침에 대한 고민이 있었기 때문에 섣부르게 결정하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아침을 잘 맞이할 수 있을까. 사소하지만 전혀 사소하지 않은 것을 목표로 두고 기상 시간을 고민했다. 오전 6시나 7시는 너무 피곤하고, 알람 없이 늦잠을 자는 것은 아침을 지나쳐서 몸을 늘어지게 만들었다. 그래서 6시와 12시의 사이인 9시로 정했다. 9시는 약간의 여유가 있는 아침시간인데, 그런 시간에 기상하는 것은 몇 년 만의 일이었다. 실험이라도 하는 것처럼 호기심에 가득 차서 알람을 맞추고 계획대로 9시에 일어났다. 첫 느낌은 약간의 피로감과 상쾌함이 모두 있었다. 어렸을 때나 느껴본 감각이었다.

늦잠을 잔 것은 아니기에 몸의 피로가 모두 풀리지는 않았지만, 수면시간이 적당해서 늘 있던 두통이 사라졌다. 두통이 사라지니 기분 좋게 눈을 뜰 수 있었고 당연하게 지나치던 햇살을 새삼스레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인생은 결국 행복을 위로로 삼고 살아가야 하는 것인데, 나는 매일의 인생을 시작하는 아침을 괴롭고 힘겹게 열었다. 그러니 하루하루가, 그렇게 쌓인 인생이 늘 지치고 힘들었던 것이 아닐까. 사람이 살아가려면 꼭 해야 하는 것, 이를테면 밥을 먹거나 잠을 자고 일어나는 것 같은 기본적인 일상을 좀 더 소중히 보살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여행의 또 다른 목표는 먹고 싶은 것은 무조건 먹고 사고 싶은 것은 마음껏 사는 것이었다. 일상에서 받은 스트레스와 고민 중 나의 욕구와 관련한 것도 크게 자리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식욕이나 소비 욕구를 끊임없이 자극하는 사회에서 살아간다. 자본이 충분히 있는 사람은 그러한 욕구에 충실한 삶을 살아갈 수 있지만, 충분한 자본이 없는 사람은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근본적인 원인제공자, 즉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자신의 욕구만을 다스려야 한다. 모두가 먹으라고 외치는 세상에서 참을 인을 새기며 자신의 애꿎은 식욕을 참는 셈이다. 아이러니와 불합리 속에서 나의 욕구만을 다스리는 것에 이골이 나 이번 여행에서는 식욕을 포함한 소비 욕구를 마음껏 해방시켜주기로 했다.

이를 달성하려다 보니 하루에 네 끼니에서 다섯 끼니까지 먹는 것이 기본이었다. 준비를 마치고 언니와 함께 고쿠라역 시내로 나섰는데 ‘저 빵집 괜찮지’, ‘저 식당에서는 그걸 꼭 먹어야 해’ 등의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 꼭 이 지역의 현지인이라도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물론 3박 4일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많이 먹고 많이 경험했기 때문이지만 이정도로 낯선 환경에 적응하고 정이 들어버린 것이 신기했다.

 

 

이국적인 풍경과 조용하고 신비한 느낌, 그런 것들도 정이 드는 데 한몫했지만 무엇보다 친절한 사람들의 덕이 컸다. 해외여행을 하면 계산을 해야 하는 때만큼 긴장되는 순간이 없다. 한국은 카드 문화가 발달했지만 대부분의 나라는 기본적으로 현금을 사용하고 특수한 경우에 카드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밥을 먹거나 교통수단을 이용하는 등 기본적인 생활을 영위하려면 그 나라의 지폐를 이용해 계산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은 외국인도 쉽게 계산을 할 수 있는 나라였다. 그들은 내국인끼리도 지폐와 동전을 하나씩 세며 보여주는데, 돈을 받았을 때와 다시 건네줄 때 그러한 방식을 반드시 거쳤다. 손님이 붐비는 대형마트나 편의점도 예외는 없었다. 과한 친절이라고 느껴질 정도였는데 계산을 서두르는 사람이나 재촉하는 사람이 없었다. 도로에서도 무조건 보행자를 우선하고 클락션을 울리거나 재촉하는 자동차가 없었다. 우리도 서두를 필요 없이 여유롭게 살아갈 수 있다면, 또 알바생의 최저시급이 더 높아진다면 그렇게 편안한 사회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여행을 통해 한국에서 했던 고민이 해소되는 일은 또 있었다. 일본에 있는 동안은 한국에 있을 때보다 더 편안했는데,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는 이 하나 없는 타국에 언니와 단 둘이 있었는데도 말이다. 이 곳에서는 내가 무슨 옷을 입어도 신경 쓰는 사람이 없었다. 애초에 외국인임에도 불구하고 쳐다보는 사람이 없었다. 물론 길을 걷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사람을 쳐다보게 되지만, 그 시간이 결코 오래 가지 않고 시선에 어떤 뉘앙스가 담겨있지 않았다. 한국에서 흔히 쓰이는 ‘시선강간’이 없었다는 뜻이다. 시선뿐만이 아니었다. 필자는 평소 지하철과 버스를 타면 늘 스트레스를 받는다. 사람이 붐비는 장소에서 몸끼리 맞닿거나 부딪히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님에도 일어나는 접촉이 많았다. 자리가 많은데 굳이 내 옆에서 계속 기대오는 사람, 허벅지를 만지는 사람, 갑자기 걸어와서 팔을 만지고 도망가는 사람 등등. 그러다보니 내가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이용해야 하는 교통수단에서 늘 긴장하고 방어할 준비를 취했다. 평범한 일상도 편안하지 않고 안심할 수 없는 것이다.

 

 

일본에서 그런 일이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가끔 어린 아이들이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외국인을 바라보기는 했지만, 그것 외에는 아무도 쳐다보지도, 접촉하지도 않았다. 덕분에 버스를 타면 내가 내릴 곳에 관한 생각만 할 수 있었고, 지하철에 타면 여유롭게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그동안 스스로 너무 예민하다고 느꼈고 그것 때문에 고민이 많았는데, 그 이유는 나에게 있지 않았다. 내가 살아온 환경과 삶에 있었다. 내가 유별난 사람이 아니라는 것, 유별난 사람이더라도 스스로 안전하다고 안심하는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이번이 처음으로 한 일본 여행은 아니었다. 작년에는 오키나와에 갔는데, 힘든 일을 많이 겪고 나서 숨통을 트이기 위해 간 것이었다. 오키나와 여행이 일상을 잠시 멈추고 내가 충전할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면, 이번의 기타큐슈 여행은 일상에서 한 걸음 물러나 스스로와 삶에 관한 고민을 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매번 목표와 의미가 달랐지만 일본은 나에게 충전하는 곳이자 안심할 수 있는 곳, 그러니까 평화로운 곳이 되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적인 공간이 평화로운 곳이 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가 있는 공간이 변화하도록 노력하면서 동시에 내가 노력을 하지 않아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평화로울 수 있는 곳을 하나 만들어두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그 공간이 일본이든, 내 방 한 구석이든 말이다. <대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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