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수 에세이> 신나치즘 행렬 소식에 대한 소고

비도 오고 날이 선선해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기승을 부리던 무더위가 어디로 갔는지 도저히 찾을 수 없을 정도다. 하루걸러 하루 창가에는 비가 내리고, 무더위를 식혀 줄 빗줄기가 아스팔트를 조용히 적신다. 빗소리는 언제 들어도 아름답다. 그것은 그것 나름대로의 선율이 있고 세상 사람들이 사는 소리에는 또 나름의 선율이 흐른다. 누군가는 우산을 쓰고 지나가면서 우산 없는 누군가에게 자신의 우산을 건네고. 유모차를 끌던 누구는 부리나케 점박이 우산을 켠다. 세상사는 것은 이처럼 고요하고 아름답게 흘러간다. 그 누구도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외치지 않아도, 세상은 모두 그것을 알아주는 것만 같다.

 

▲ 사진=무료이미지사이트 pixabay.com

 

반면에 며칠 전부터 미국에서 신나치즘 행렬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여기저기서 걱정스럽게 들려온다. 나치와 맞서서 20만 명이 죽어나간 미국 땅에서 신나치즘 행렬이 일어난다는 것에 대해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목소리가 많다. 심지어 독일 정부에서 역겨운 행위라고 비난했다는 것만 봐도 얼마나 부조리한 행렬이 여러 사람들의 고요와 평안을 깨고 있는지 알 수 있게끔 한다. 비가 오고, 평안하면서, 아름다울 것만 같은 세상은 전혀 그렇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우리가 따뜻한 커피 한 잔을 하면서 세상 구경을 하는 사이에, 세상은 수많은 부조리를 껴안고 동시에 흘러간다. 세상 사람들이 살아간다는 것이 모두 같을 수 없는 것처럼, 수많은 이견과 목소리는 강둑을 넘어설 것 같은 빗물처럼 넘실거린다.

우리는 살아있다는 이유만으로, 죽어가는 것들에 대해 안타까워하고 슬퍼할 겨를을 잃는다. 차 한 잔을 하면서 여유를 부리려고 해도 그것은 결코 여유가 아니다. 또 다른 무언가를 하기 위한 발판이 되어야 하고, 발전을 위한 발돋움이 되어야만 한다는 숙명 속에서 차 한 잔이 고요히 식을 여유조차 잃어버린다. 살아남기 위해 아등바등 노력하는 삶은 삶의 또 다른 중요한 무언가를 무디게 만들어버린다. 그것은 살아가는 것에 이유를 찾지 않으면 도저히 살 수 없는 우리들의 속성에 의한 것이다. 이유를 찾다보니, 누군가를 죽이지 않으면 안 될 이유를 찾는 것과 다름없는 우리의 치졸하고 비겁한 생애를 당연한 것처럼 포장하고 가꾼다.

마냥 고요할 것만 같은 삶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신나치즘 행렬과 같은 부조리극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누군가는 평화를 지독하게 싫어하는 경우가 있다. 실은 평화를 가장한 세상 속에 수많은 사람들이 이미 죽어가고 있는데도, 신나치즘을 신봉하는 일부의 무리들처럼 더 많은 세상의 파괴와 그로 인한 죽음을 꿈꾸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들은 죽어버린 누군가를 다시 돌이켜 생각하지 않는 자들이다. 오직 자신이 살아가는 것만을 안중에 두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자신이 살아가는 것을 제하고는 그 어떤 것도 볼 수 없고, 누군가가 죽었다는 것에 대해서도 무감각한 사람들이다. 나치즘과 같은 극단적인 경우의 예뿐만 아니라 그런 사람들은 우리 사회, 우리라는 우리 안에서도 너무 많이 발견할 수 있다. 누군가의 죽음에 추모해야 한다는 마음씨에 우리가 무엇 하러, 무슨 이유로, 라며 지독하게 그들의 생존만을 외치는 자들이다.

지금의 세상이 과거에 비해 평화로울 수 있는 이유는 단 한 가지다. 슬픔을 껴안고 흘러가기 때문이다. 과거의 지나친 죽음, 살상과 무고한 희생자들의 피를 껴안고 세상이 흘러가기 때문에, 전쟁이 빈번했던 과거의 삶에 비해 우리는 한결 평화롭다고 느끼는 것이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신작인 영화 ‘덩케르크’만 보아도 덜덜 떨며, 폭탄이 어디에 떨어질 지, 또 누가 죽어나갈 지, 불안에 떨고 있는 우리 자신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우리는 좀 더 다행스러운 세계 속에 살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더 노력해야할 것은 지금보다도 더 다행스러운 세계를 만들기 위해 애쓰는 것이다. 결코 새로운 나치즘을 신봉하며 또 다른 인종과 세계민을 죽음의 공포에 몰아넣으려는 행위는 우리의 세상이 추구해야 할 과제라고 할 수 없다.

평화 속에 살고 있는 자들은 나치의 부활을 외치며 행렬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죽음의 그림자로 가득한 시리아 지역, 또 수많은 사람들이 병들거나 아사하는 아프리카를 비롯한 빈민구제지역에서는 누군가를 죽일 형편조차 되지 않는다. 결국 누구를 죽인다는 것은 살아있을 수 있는 사람들의 여유다. 여유라곤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우리는 바쁘게 살아가고 있는데도, 궁극적으로 우리는 누군가를 죽이는데 우리의 여유를 쏟아 붓는다. 평화가 만연한 지역일수록 그렇다. 사과와 추모에 대해서는 인색하고 우리는 살아가는데 도저히 바쁘다고 불평한다. 그러나 비 오는 날, 빗소리를 들으며 죽어가는 사람과 모든 것들에 대해 슬퍼해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노력이라는 구실로, 대의라는 이유로, 살아있는 사람들은 착취당하고 부조리에 익숙해진다.

목적의식이라는 것이 이처럼 무섭다. 앞으로 나아가는 듯한 기분을 주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다른 누군가, 또는 누군가의 집단, 그 가장 위에 올라서 있는 또 다른 누군가들의 목적을 향해 우리는 쉽게 조종당한다. 신나치즘이 새롭게 등장한 현실 속에서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누구의 목적의식일까, 라는 것이다. 또 누군가 새로운 이유를 만들고 그것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조종하려고 한다. 다양성을 잃은 획일화가 얼마나 사람 사는 세상을 무섭게 파괴하는지 우리는 모두 목격했으면서도, 목적과 이유에 취해버린 사람들은 풀려나기 어렵다. 바쁘게 그 끝을 향해 나아가야만 하고, 스스로의 여유를 삭제해버린다. 사람에게 있어서 여유의 중요성은 알지 못하고 그것을 전부 누군가를 죽임에 써버린다. 자신이 삭막해져버림에 따라 남들에게 그 화살을 되돌리려고 한다. 우경화가 빚어내는 우리 세계의 위기는 이렇게 마비되어버린 개개인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하지만 다시 고개를 창밖으로 내밀어 우리 눈앞에 있는 세상을 보자. 얼마나 고요하고 아름다운 세상인가. 적어도 우리의 지금은 얼마나 평화롭고 여유로운가. 거대한 사회와 조직들에 의해 드리워진 어둠, 그리고 이유와 목적에 취해버린 우리 개개인을 그로부터 풀려나오게끔 하는 것은 일상이다. 지극히 평범하고 그래서 더 아름다운 우리의 일상 말이다. 비가 오는 창밖으로 지나가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의 찰박이는 발걸음과 그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을 사랑하고, 유모차 안에서 웃고 있는 아이를 사랑하면 된다. 우리의 일상을 사랑하는 것만큼 세상에 대해 퍼붓는 막연한 분노로부터 멀어질 수 있는 좋은 방법은 없다.

살아있는 모든 것에 대해 사랑한다면, 죽어가는 모든 것들에 대해 슬퍼하자. 나로 인한 죽음은 아니어도, 나의 세계로 인한 모든 죽음이다. 아무 이유 없이 일찍이 시들어야 했던 모든 꽃들에 대해 눈물을 흘리자. 신나치즘과 차별주의, 누군가의 안타까운 죽음보다는 효율과 가치 환원을 부르짖는 사람들에 맞서 싸우자, 사랑하는 방법으로. 우리는 더 깊이 단결해야 한다. 어떤 정치적 단결이 아닌, 정말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의 공유로써. 그리고 그 매듭이 더욱 단단해질 때까지, 우리는 그 정신을 놓아선 안 된다. <대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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