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류승연의 아주머니

“엄마~ 학교에서 동요대회 한다고 하고 싶은 사람 신청서 내래. 나 선생님한테 말해서 신청서 가져왔으니까 엄마가 사인해 줘.”

한 달 전 학교에서 돌아온 딸이 신발을 벗기도 전에 현관에서 통보를 한다. 동요대회에 출전하고 싶으니 신청서에 사인을 하란다. 허허. 당돌한 것.

이것저것 물어보니 자기네 반에서는 두 명이 출전하겠다고 손을 들었단다. 학년 별 예선을 치른 뒤 본선에서 학교 대표가 가려지고, 학교 대표는 같은 구 내의 초등학교 대표들끼리 경쟁해 최종 승자를 가려내는 시스템인 것 같다.

 

 

아홉 살 인생. 스스로의 의지로 무언가에 도전을 하는 첫 번째 경험이다. 당연히 대환영. 신청서에 사인을 한 뒤 본격적으로 동요대회 준비에 들어갔다.

부르고 싶은 노래가 있냐고 하니 이미 정해놨단다. ‘연어야 연어야’를 부르겠단다.

“푸르른 강물 거슬러~ 헤엄치는 연어야~ 너의 맑은 눈빛이~ 참 아름답구나~”라는 내용의 노래인데 나는 처음 듣는 곡이다.

자기가 들려주겠다며 노래를 시작하는데 큰일 났다. 음치다. 반박할 수 없는 음치. 처음 듣는 데도 단박에 틀렸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음정이 갑자기 내려가거나 어이없이 삐쭉대며 올라간다.

우리 딸은 노래를 못한다. 그런데 노래 부르는 건 또 좋아해서 키즈카페 갈 때마다 작은 노래방에서 나올 생각을 안 한다. 노래를 좋아하는 건 나 때문인 것 같기도 한데 나는 하기 싫은 일, 이를테면 설거지를 하거나 청소를 할 때마다 노래를 부른다. 노래를 부르면 하기 싫다는 생각을 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렇게 하루에도 몇 번씩 노래를 부르는 엄마의 모습을 보고 자라서인지 자기도 틈나는 대로 노래를 한다. 하지만 ‘목소리 미인’인 엄마는 대강 불러도 노래를 잘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너는 아직 땍땍거리는 초등학교 2학년 목소리잖니. 음정과 박자까지 안 맞으면 그냥 노래 못하는 어린아이일 뿐이야. 물론 이런 얘기는 속으로만 삭인다.

아, 참고로 나는 ‘목소리 미인’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목소리‘만’ 미인. 특히 전화 목소리는 더 예뻐서 젊을 때는 목소리에 껌뻑 죽는 남자들이 많았다. 나는 그들의 환상을 보호해 주고자 안 볼 수 있을 때까지 얼굴은 안 보이고 전화로만 소통을 하곤 했다.

특히 이런 목소리는 기자 일을 할 때 매우 유용했는데 1년 넘게 전화로만 통화했던 모 정당의 취재원은 외국에 나가 있을 때조차 국제전화를 걸어와 나에게 정보를 알려주는 등 헌신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와 연락이 뜸해진 게 언제부터더라…. 내 얼굴을 본 다음부터인지, 내 결혼소식을 듣고 나서인지…. 아무튼 그렇다. 목소리‘만’ 미인으로 살아가는 자의 비애랄까.

어쨌든 우리 딸도 성인이 되면 진짜 자기의 목소리를 갖게 되겠지만 아직은 시끄럽고 땍땍대는 초등학생의 목소리일 뿐이다. 게다가 박자와 음정까지 무시하는 음치 중의 음치.

그래도 음치라는 말은 절대 꺼내지 않는다. 중요한 건 잘하는 것보다 도전하는 것이다.

어차피 못 부르는 노래. 최소한 망신이라도 당하지 않게 하려고 팁을 하나 알려준다. “수인아, 노래를 할 때 크~게 불러. 아주 크~게. 그러면 너희들은 아직 어린이들이기 때문에 조금 틀리는 부분이 있어도 노래를 잘하는 것처럼 들려.”

그리고 중간에 가사를 까먹거나 음정이 틀렸을 때 대처하는 법도 알려준다.

“중간에 실수를 해서 부끄러운 마음이 들 때는 어떻게 하면 된다고?”

“그냥 한 번 씨익 웃고 다시 부르면 돼~.”

“맞아 맞아 바로 그러면 돼. 그러면 보는 사람들도 더 좋아하고 오히려 더 잘하라고 응원해 줘.”

인터넷에서 ‘연어야 연어야’의 동영상을 구해서 딸의 휴대폰에 저장을 해줬다. 동영상 속의 언니가 부르는 노래를 잘 듣고 틈나는 대로 함께 불러보라고 했다. 그 때부터 딸 방에서는 아침부터 밤까지 딸의 노래 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일주일 정도 지났을까. 딸이 다니는 피아노 학원의 원장에게 전화가 온다. 학원에서 동요대회 출전하는 아이들을 연습시켜 주고 있단다.

“어머니~ 근데. 이런 말씀 드리기 뭐하지만 수인이요. 음치끼가 있어요.”

원장도 걱정이 됐던 거다. 제 멋대로 노래를 불러대는 음치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 남들이 웃기라도 하면 어쩔까 걱정이 됐던 거다. 그래도 스스로 원해서 한 도전인 만큼 그 자체를 존중해 주기로. 원장과 나는 딸에게 “너는 음치야”라는 사실을 숨긴 채 열심히 딸의 도전을 응원했다.

동요대회 하루 전, 밤에 에어로빅을 갔다 오니 남편이 딸과 노래 연습에 한창이다. 그런데 음정이 이상하다. 평소 부르던 것보다 한 키 높게 노래를 부르고 있다.

왜 그렇게 부르냐니까 피아노학원 원장 선생님이 높게 부르라고 했단다. 남편도 키를 높인 게 더 낫다며 그대로 하란다. 그런데 나는 암만 들어도 이전이 더 낫다. 키가 높아져버리자 목소리 크기가 반으로 줄어들었다.

어차피 고만고만한 목소리를 가진 초등학교 2학년의 동요대회에서는 자신감 있고 크게 부르는 게 중요한데 키를 높이자 딸의 가장 큰 장점이던 ‘자신감’이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다시 키를 낮추려 하자 남편이 눈에 불을 켜고 반대를 한다. 안 된단다. 키를 높인 상태에서 크게 부르는 걸 연습하란다. 내일이 대회인데. 키를 높이느냐 낮추느냐의 문제로 부부싸움을 할 지경에 이르자 결국 알았다며 내가 한 걸음 물러났다.

“내일 통과 못하면 어떡하지?”라며 불안해하는 딸에게 본선에 나가면 좋은 거고 안 나가도 좋은 거라며, 용기를 내서 도전을 한 딸이 얼마나 멋있는지 구구절절 설명을 했다.

같은 반에서 함께 출전을 한 남자아이는 중도포기를 했단다. 아빠 앞에서 노래를 불렀는데 아빠가 “넌 음치야”라고 했다며 동요대회에 나가지 않겠다고 선생님에게 말했단다. 딸이 음치임을 숨긴 게 다행이었다. 휴~.

동요대회 당일. 하교 후 피아노 학원에 도착한 딸이 전화를 걸어온다.

노래는 잘 했냐고 물으니 “엄마, 본선에는 못 나가게 됐는데 그래도 장려상은 다 준대. 그럼 나 통과 된 거야?”라고 묻는다. 마침 내가 시끄러운 외부에 있었던 데다 ‘통과’라는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해서 얼떨결에 “응”이라고 대답하니 “이예~”라고 좋아한다. “사랑해~ 이따 봐”하며 얼른 전화를 끊는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통과라는 게 본선진출을 말하는 것 같다. 예선 탈락한 아이들에게는 참가상처럼 전원에게 장려상을 주는 것 같다. 결국 통과되지 못한 건데 딸은 통과된 걸로 알게 되었다.

곧바로 전화를 거니 안 받는다. 수업이 시작됐나 보다. 아무래도 사실을 즉시 알려야겠다 싶어서 한 시간 뒤 태권도 학원으로 직접 갔다. 딸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는데 아는 엄마가 뒤에서 아는 체를 한다. 딸한테 할 말이 있어서 왔다고 하니까 안 그래도 우리 딸이 태권도 학원에 들어서자마자 “저 동요대회 통과됐어요~”라며 동네방네 자랑을 했단다.

이럴 줄 알았어. 안 봐도 비디오다. 이미 한 발 늦었다. 피아노 학원에서도 친구에게 자기가 본선에 통과됐다고 말하고 다닌 모양이다. 태권도복으로 갈아입은 딸이 모습을 드러내자 얼른 불렀다. 무릎을 꿇고 딸 손을 잡고 차근차근 말을 했다. 사실 통과된 게 아니라고. 대신 통과되진 못했지만 수인이가 잘했기 때문에 장려상을 받게 된 거라고.

한껏 실망한 딸. “나 통과한 거 아니야?”라며 위축된 표정을 짓는다. 통과된 건 아닌데 엄마는 너무 자랑스럽다고. 중도포기 한 친구도 있는데 수인이는 용기를 내서 끝까지 하지 않았냐고. 그런 용기를 낸 게 정말 멋있는 거라고. 아무튼 딸래미의 비위를 맞춰줄 말을 줄줄줄 읊어댔다.

알겠다며 다시 도장으로 들어간다. 집에서 보자며 인사를 하고 나왔다.

집에 도착한 딸이 결심한 듯 말한다. 이번에 부른 ‘연어야 연어야’는 너무 어려웠단다. 내년에는 ‘노을’로 다시 도전을 하겠단다.

“그래. 그러면 돼. 그래서 내년에도 통과 못하면 그 땐 어떡하면 된다고? 그래, 맞아. 내년에 통과 못하면 4학년 때 또 도전, 그 때도 안 되면 5학년, 6학년 될 때까지 계속 도전하면 되는 거야.”

원래 이렇게 도전을 많이 해도 되냐고 묻는다. 그럼. 도전은 인생을 살면서 죽는 날까지 계속하는 거라고 말해준다. 엄마도 그러느냐고 묻는다. 그럼. 엄마도 마흔 살이 넘었지만 도전을 계속하고 있다고 했다.

씨익 웃으며 딸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바아~람이 머~물다 간 들판에~ 모락모락 피어나는 저녁 연기~.” 3학년 동요대회에 출전할 ‘노을’이다. 여전히 음치다. 하지만 어떠랴. 딸의 도전은 계속될 것이다. 본선에 통과될 그 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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